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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소설] 어느 꿈의 요람 [테일즈위버]

* 본 글은 테일즈위버 세계관/NPC를 바탕으로 한 2차 창작.
* 2차 해석 주의
“매일 같이 배가 드나들던 무역항에서 시작된,
이제는 바스러져 버린 우리의 행복했던 꿈.”
분주한 사람들 사이, 유달리 느긋한 소년이 눈에 띈다. 소년이 발걸음을 옮길 때 마다 딸각대는 샌들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갈색 샌들에 갈색 머리, 나부끼는 머리카락 사이로 보이는 눈동자 역시 갈색이었다. 그러나 손에 든 사과는 눈이 시릴 정도로 새 파란 색이다. 사과를 빙글빙글 돌리고 있는데 어느 아낙이 소년에게 아는 채를 해 왔다.
“마크, 설마 또 훔친 거냐?”
“아줌마도 참. 도둑질은 졸업했다고요.”
마크라고 호명된 소년이 한껏 거드름을 피웠다. 그리고 기세 좋게 사과를 한 입 베어 물었다. 덜 익은 사과에서는 시고 떫은맛이 났지만 소년은 도리어 밝게 웃었다. 부랑아(浮浪兒) 생활이 길었던 소년의 입맛은 몹시 관대했다.
“그 ‘학원’이라는 게 대단하기는 한가보네? 말썽쟁이가 이렇게 얌전해지고.”
“제 걱정보다는 아줌마네 자식들 걱정이나 하세요.”
“다음번에는 우리 가게로 오렴. 지금 그것보다는 더 좋은 걸 골라줄 테니까.”
손가락에 남은 과즙을 핥으며 소년이 어깨를 으쓱였다.
“언제는 도둑놈 따위 얼씬도 말라면서요?”
“제값을 내는 손님은 언제나 환영이란다.”
소년은 아낙에게 손을 흔들어 인사한 후 광장 쪽으로 걸어갔다. 가는 길에 만물상을 비롯한 작은 가게들도 여유롭게 둘러보았다. 광장에서 크게 오른쪽으로 돌아 해안가로 걸었다. 소년은 고작 9살이었으나 또래답지 않게 바닷가 술집들에도 익숙하게 얼굴을 들이밀었다. 붉은 구두가 그려진 주점에 들어가자 젊은 웨이트리스가 반갑게 인사했다.
“오늘도 탐험 중이니?”
“자유시간은 최대한 즐겨야지요! 다른 시간은 얼마나 바쁜지 모른다고요.”
웨이트리스가 소년에게 우유 한 잔을 따라 주며 말했다.
“이건 서비스. 다음번에도 선생님들을 우리 가게에 데리고 와야 한다?”
“아이스크림도 주시면 그렇게 할게요.”
공짜 아이스크림까지 얻어먹은 주제에 소년은 푸른 고래가 그려진 주점에도 얼굴을 비췄다. 때마침 금빛 콧수염을 기른 모험가가 주인과 떠들썩하게 수다를 떨고 있었다.
“랄프 아저씨, 이번에도 살아 돌아온 거야?”
“위드마크? 정말이지 공짜 촉하다는 끝내주는 꼬마라니까.”
* * *
위드마크 리프크네는 나르비크에서도 손꼽히는 악동이었다. 밤톨만큼 작은 꼬마였지만 그를 돌봐줄 부모는 없었다. 대신에 멍청한 관광객들의 지갑을 털며 먹고 살았다. 위드마크는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나 뒷골목에 자리를 잡았지만, 마을 주민들 누구도 그를 신경 쓰지 않았다. 번화한 항구마을에는 이미 충분히 많은 거지와 소매치기들이 있었다. 새삼스레 꼬마 도둑이 하나 둘 늘던 이상스러운 일이 아니었다. 사나운 눈매를 가진 꼬마가 접근하면 쉬쉬 피해버리면 그만이었다.
그런 기분 나쁜 꼬맹이가 요사이 몰라보게 변했다. 얼굴도 멀끔해지고 행동에도 여유가 있었다. 별 것 아닌 말에 곧잘 웃기도 했다.
위드마크가 변하게 된 것은 어느 자선 사업가들과 어울리기 시작한 무렵부터였다. 나르비크 외각에는 괴이한 귀족이 설립한 ‘학원’라는 것이 있었는데, 귀족자제들이 아니라 갈 곳 없는 아이들에게 공짜로 공부를 가르치고 있었다. 여러 가지로 수상한 기관이었지만 그곳에 소속된 선생들이 번화가에서 많은 돈을 썼기 때문에 주민들은 그들을 크게 반겼다. 왕실 수비대들조차 돈이 썩어나는 귀족들의 새로운 놀이겠거니 넘겨버렸다.
주점 문이 열리며 위드마크 슬금슬금 빠져나왔다. 살짝 열린 문틈으로 어느 새 벌건 얼굴이 된 모험가의 얼굴이 보였다. 랄프는 마주 앉은 소년이 사라졌는데도 눈치 채지 못하고 모험담을 늘어놓고 있었다. 위드마크가 한숨을 쉬며 어깨를 으쓱였다.
“정말이지 자기자랑을 너무 좋아하신다니까. 공짜 밥을 사주시는 건 감사하지만…….”
위드마크는 마지막으로 여관 쪽 골목을 탐색하기로 했다. 여관을 한 바퀴 돌고 ‘집’으로 돌아가려는데, 못 보던 작은 그림자가 뒷문에 얼쩡거리고 있었다. 문가에 세워둔 쓰레기를 뒤지는 모습을 보고 처음에는 도둑고양이라고 생각했다. 무엇을 먹고 자란 건지 사람 아이만큼 몸뚱이가 거대했다. 위드마크는 눈을 좁히며 검은 고양이를 관찰해보았다.
고양이가 아니었다. 검은 머리에 보라색 망토를 뒤집어 쓴 꼬맹이였다. 사실 위드마크의 시력은 그다지 좋지 못했다.
“처음 보는 꼬맹이네.”
본인도 조그마한 아이인 주제에 위드마크는 주저 없이 그를 ‘꼬맹이’라고 불렀다. 이유는 간단했다. 저 꼬마가 자신보다 더 작으니까!
위드마크는 범인을 미행하는 탐정이라도 된 것처럼 건물 그늘에 몸을 숨겼다. 그리고 물끄러미 꼬마를 지켜보았다. 꼬마는 여관 주인이 내놓은 쓰레기와 빈 그릇 따위를 살펴보다가 반만 먹다 버린 빵 조각을 발견해 바로 입에 넣어버렸다. 다른 수확물이 없자 꼬마는 비틀거리며 다른 곳으로 몸을 옮겼다. 위드마크가 꼬마의 뒤를 밟았다.
꼬마는 몹시 굶주린 모양인지 주로 음식점이나 여관 주위를 맴돌았다. 그러나 꼬마가 발견한 것이라고는 빵가루와 기름에 절어 있는 야채 몇 조각뿐이었다.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기 시작하자 꼬마는 좁고 그늘진 골목으로 기어 들어갔다. 꼬마는 고양이처럼 건물 사이에 웅크려 앉아 익숙하게 망토로 몸을 덮었다. 주변을 두리번거리는가 싶더니 금세 잠들었다.
위드마크는 골목 밖에 서서 쭉 꼬마를 지켜보았다. 벽에 몸을 밀착시키고 숨소리도 죽인 채 우두커니 꼬마의 행동을 주시했다. 그리고 꼬마가 잠든 후에도 골목을 떠나지 않았다. 석양이 지고 땅거미가 내릴 때까지 계속 벽에 기대어 서있었다. 위드마크는 샛별이 뚜렷해질 때에야 겨우 ‘집’으로 돌아갔다.
그 날 이후, 위드마크는 자유시간 내내 검은 머리 꼬마를 관찰했다. 다음날도 그 다음날도 꼬마는 나르비크 거리를 배회하고 있었다. 신기하게도 위드마크는 꼬마가 있는 곳을 금방 찾아낼 수 있었다. 갈 곳 없는 아이가 다닐만한 곳쯤은 훤히 꿰고 있던 탓이다.
며칠 째 귀가가 늦어지자 결국 위드마크는 ‘교무실’로 불려가 반성문을 쓰게 됐다. 위드마크가 멀거니 흰 종이를 노려보았다. 소년은 연필만 빙글빙글 돌릴 뿐 한 마디도 적을 수 없었다. 아무래도 오늘은 그 꼬마를 관찰하기 그른 것 같았다.
“리프크네 군, 이번에는 무슨 사고를 친 건가요?”
녹색으로 칠한 나무문이 열리며 검은 연미복 차림의 신사가 들어왔다. 신사 뒤에는 위드마크에게 벌을 준 선생님도 함께 서 있었다. 위드마크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자 붉은 넥타이를 맨 선생이 대신 입을 열었다.
“소등(消燈) 시간이 지나도록 기숙사에 돌아오지 않아 벌을 주고 있었습니다.”
“저런, 약속시간을 지키지 않는 것은 옳지 못한 일입니다.”
말과는 달리 신사는 인자하게 미소 짓고 있었다. 선생님도 그리 화가 난 표정은 아니었다. 위드마크가 얼굴을 붉혔다.
“죄송합니다.”
“그런데 반성문은 한 글자도 적지 않았군요.”
“그건…….”
위드마크가 침을 꾹 삼켰다. 신사는 말없이 아이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비록 귀가시간을 어겼지만, 저는 제가 잘못된 행동을 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어째서 인가요?”
“…….”
신사가 아이 옆에 앉으며 다시 물었다.
“질문을 바꾸지요. 어째서 귀가시간을 지키지 않은 건가요?”
“길을 잃었습니다.”
“들킬 거짓말은 하지 말라고 가르쳤지요? 다시 말해 보세요.”
위드마크가 눈을 내리뜨며 말했다. 경직되었던 언어도 다소 유해졌다.
“갈 곳 없는 꼬마를 지켜보고 있었어요.”
“왜 그 꼬마를 지켜보고 있었나요?”
“꼬마가… 신경 쓰였어요.”
“그 꼬마가 신경 쓰인 이유가 무언가요?”
종이가 구겨지는 소리가 들렸다. 연필도 책상 위를 따라 또르르 굴렀다. 연필의 움직임을 눈으로 쫓으며 위드마크가 아주 천천히 말했다.
“예전의 저와 닮았으니까요.”
“어머.”
문가에 서 있던 선생님이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위드마크가 솔직하게 제 마음을 터놓는 것은 몹시 드문 일이었다. 그가 무슨 일을 하며 돌아다녔는지, 붉은 넥타이의 선생님은 이미 알고 있었다. 다만 아이가 먼저 이야기를 꺼내, 선생인 자신에게 상담해주길 기다렸다. 그러나 위드마크는 아무런 말도 해주지 않았다.
검은 옷의 신사는 아주 능숙하게 아이의 감춰둔 마음을 끄집어냈다. 신사의 목소리에는 사람을 깨우치는 신비한 힘이 있었다. 일종의 마성(魔性)과도 같았다.
이번에는 위드마크가 먼저 말했다.
“저는 부모도 형제도 없지만, 스스로 불쌍하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어요. 처음에는 불공평한 세상이니까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어요. 그리고 지금은 선생님이나 다른 친구들이 있어서 행복해요. 하지만 그 애를 보고 있자니, 사실은 저도 불쌍한 아이였던 걸까… 단지 운 좋게 선생님을 만나 구제 받은 게 아닐까 생각하게 돼요.”
어느 새 위드마크는 똑똑히 신사의 얼굴을 올려보고 있었다. 눈가가 조금 붉었지만 그 점이 도리어 그 또래다웠다.
“그 아이에게 무언가 해 주고 싶어요. 선생님이 제게 해주신 것처럼 그 애를 돕고 싶어. 하지만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신사가 위드마크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말했다.
“친구가 되어주렴.”
“…그 애도 여기 데려와도 될까요?”
신사가 선생님 쪽을 돌아보았다.
“아드리안 선생님, 리프크네 군의 벌을 없던 것으로 해 줄 있나요?”
“물론이지요, 선생님.”
“아드리안 선생님께서 허락했네요. 오늘은 늦지 않게 돌아오세요, 리프크네 군.”
위드마크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달음박질해 사라지는 아이를 향해 아드리안 선생이 꾸중을 늘어놓았다.
“은혜를 입으면 꼭 ‘감사합니다’라고 말하세요! 이런, 벌써 사라졌네.”
아드리안 선생이 고개를 저었다. 신사는 여전히 인자하게 웃고 있었다.
“언제나 존경하게 됩니다. 저 고집쟁이가 먼저 입을 열게 만들다니.”
“아이들과 눈을 맞추고 끝까지 말을 들어주세요. 그리고 아주 천천히 가르쳐 나가는 겁니다. 아이들로 시작해서, 이 나라 모든 민중들까지.”
복도에 울리는 샌들 소리를 들으며 아드리안이 씩 웃었다.
“예, 당스부르크 선생님.”
* * *
기세 좋게 나르비크 광장까지 온 것은 좋았다. 그러나 위드마크는 다시 고민에 빠졌다. 신사의 말에 기뻐 뛰쳐나오기는 했는데, 어떻게 그 아이에게 말을 붙이지? 갑자기 말을 걸었다고 도망가 버리면 어떡해? 은행 벽에 몸을 기대어 서 팔짱을 꼈다. 여럿 생각들이 떠올랐지만 이렇다 할 좋은 생각은 떠오르지 않았다. 대신에 배만 고파졌다. 기어이 꼬르륵 배꼽시계가 울렸다. 그러고 보니 수업 후 곧장 ‘교무실’로 불려가는 바람에 아직 점심을 못 먹었었다.
‘그 꼬마는 오늘 먹은 게 있으려나.’
근처 주점에서 꼬치구이라도 사는 게 좋을까. 먹을 것으로라도 꾀어볼까……. 그런 생각을 하는데 모퉁이 너머로 갑자기 검은 그림자가 뛰쳐나왔다. 동글동글하고 작은 그림자는 방향도 틀지 않고 그대로 위드마크 앞으로 돌진했다.
두 사람은 그대로 충돌했다. 뽀얀 먼지가 일며 무언가가 허공 위로 치솟았다.
“아파!”
위드마크가 사나운 눈매로 쏘아보며 곧장 역정을 냈다. 부딪힌 그림자는 나동그라진 채 제대로 서지도 못했다.
“이 멍청이가! 눈을 도대체 어디다 두고 다니는 거야?”
턱을 문지르며 나뒹구는 그림자를 내려다봤다. 새까만 머리에 보라색 망토, 거기다가 키에 맞지도 않은 긴 총을 메고 있었다. 그림자의 정체는 놀랍게도 위드마크가 찾고 있던 그 꼬마였다.
둘 사이에는 커다란 빵 덩이 하나가 구르고 있었다. 저 멀리서는 왕왕거리는 비명 소리가 들렸다. 위드마크는 당황했지만 얼른 상황을 파악했다.
‘저 녀석, 결국 빵을 훔쳤구나.’
꼬마는 아직도 머리를 매만지며 정신도 못 차리고 있었다. 위드마크가 냉큼 빵을 주어 들자, 그제야 자리에서 일어나 화를 내기 시작했다.
“그건 내가 훔친 빵이야. 돌려줘.”
방방 뛰는 꼬마를 향해, 위드마크는 시치미를 때며 궤변(詭辯)을 늘어놓았다.
“네가 나랑 부딪혔고 빵은 바닥에 떨어졌어. 그러니까 이제 빵의 주인은 없어졌어. 그 다음에 내가 빵을 주었으니 이젠 빵은 내 것이야.”
거리에 사람 백 명을 붙잡고 물어도 이해할 수 없는 논리였다. 굳이 집어주자면, 그 빵은 위드마크의 것도 검은 머리 꼬마의 것도 아니었다. 저 뒤에서 소란을 피우는 보따리장수의 것이었다.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당장 내놓지 못하겠어?”
꼬마는 심줄이 터질 정도로 눈을 치켜뜨며 큰 소리를 쳤다. 그러나 여전히 위드마크는 모르쇠를 잡았다. 도리어 꼬마를 향해 핀잔을 주며 말했다.
“빵 한 덩이도 제대로 못 지키면서 네 몸은 어떻게 지킬래?”
“이 자식이!!”
“보따리장수한테 걸리면 넌 뼈도 못 추길 걸.”
위드마크의 말대로 골목 저편에서 상인의 발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웅웅 울리기만 하던 목소리도 한껏 뚜렷해져 있었다. 도둑이야, 도둑 잡아라. 빵을 훔쳐 간 저 도둑놈 좀 잡아라! 꼬마가 눈을 질끈 감았다. 어깨도 와들와들 떨었다. 보따리장수에게 얻어맞고 경비대에 끌려가는 상상이라도 하는 걸까. 건방진 꼬마라고 생각했는데, 조금 귀여웠다.
웃음이 나오는 걸 참으며 위드마크가 꼬마의 손목을 잡아당겼다.
“잡혀서 왕실 수비대에 질질 끌려가기 전에 이쪽으로 따라와!”
두 아이가 골목길을 따라 해안가로 도망쳤다. 위드마크에게는 몇 푼의 돈이 있기는 했지만 머리에 잔뜩 열이 받은 보따리장수는 설령 돈을 받더라도 꼬마를 왕실 수비대에 넘겨 버릴 터였다. 어린아이의 생각으로는 같이 도주하는 것 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아이들은 푸른 고래가 그려진 주점 뒤편으로 몸을 감췄다. 나란히 검은 울타리에 기대어 가쁜 숨을 가라앉혔다.
때마침 남풍이 불어와 땀에 젖은 이마를 식혀주었다. 절벽 아래로는 푸른 파도가 넘실댔다. 먼저 체력을 회복한 위드마크가 어깨를 피며 말했다.
“내 덕분에 무사한 줄 알아.”
생글생글 웃는 위드마크와 달리 꼬마는 여전히 성난 표정이었다.
“빵이랑 감사 인사는 건너뛰고. 너 방금 내 한 몸도 못 지킨다는 말했지?”
꼬마가 주먹을 꾹 쥐며 말했다.
“그 말 지금 당장 철회해!”
“왜? 난 틀린 말 한 적 없는데.”
꼬마가 같은 말을 반복해 말했다. 철회해, 철회하란 말이야! 그러며 허공에 주먹질을 날렸다. 그것을 과장되게 피하며 위드마크가 거드름을 피웠다.
“너, 여기서 나를 때리면 넌 죽을지도 몰라. 나는 힘이 없지만 내 뒤에는 엄청난 힘이 있거든.”
“시장잡배 같은 협박은 그만둬.”
비록 꼬마는 한 쪽 눈 밖에 없었지만―오른쪽 눈에 안대를 차고 있었다― 두 눈을 가진 위드마크보다 훨씬 처절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까만 얼굴과 그늘진 눈가, 바짝 마른 입술, 얼마나 오랜 시간 제대로 된 식사도 못한 채 거리를 헤맨 걸까. 기어이 남의 물건에까지 손을 대게 할 정도로 괴로운 매일이었겠지.
‘좀 더 빨리 발견해주지 못해서 미안해.’
위드마크는 꼬마를 놀리는 일을 그만두기로 했다. 대신에 꼬마에게 꼭 하고 싶었던 이야기를 꺼냈다.
“너 보아하니 갈 데도 없어 보이는데 나랑 같이 가는 게 어때? 공부도 할 수 있고, 배도 채울 수 있고, 검술도 배울 수 있어.”
그러나 꼬마는 그의 말을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다. 무슨 바보 같은 소리냐며 얼굴을 구기기만 했다.
“그런 건 귀족들이나 배울 수 있는 거라고.”
“내 말을 여태 콧구멍으로 들은 거야?”
위드마크가 한숨을 내뱉었다.
“안되겠다. 내 소개를 하지 않으면. 너 같이 답답한 녀석하고 얘기하다 폭발하고 말 거야.”
제까짓 꼬마가 자기소개를 해 봤자. 꼬마가 콧방귀를 꼈다. 위드마크는 묵묵히 제 이름을 밝혔다.
“내 이름은 위드마크. 「위드마크 리프크네」.”
고작 이름을 말한 것뿐이었다. 그런데 묘하게 그 여덟 음절이 검은 머리 꼬마의 마음에 박혔다. 문득 제 이름은 뭐였는지 떠올렸다. 마지막으로 이름으로 불렸던 때가 언제였는지 생각했다. ‘거지’나 ‘도둑놈’이 아니라 오로지 내 이름으로 불렸던 때를 기억해냈다.
잠시 틈을 두고 위드마크가 말을 이었다. 한 쪽 뺨이 조금 상기되어 있었다.
“네가 며칠 전부터 이곳을 배회하는 걸 봤어. 너도 어디선가 도망쳐 나온 것 같은데 질질 끌려가지 말고 너를 지키는 힘을 길러.”
“나를 지킬 힘?”
“그래, 너 자신을 지킬 힘.”
꼬마의 뺨도 약간 붉어졌다. 마주한 소년의 눈은 흔하디흔한 갈색이었지만, 마치 아주 먼 미래를 보는 것만 같았다. 별처럼 반짝이는 눈이었다.
“물론 강제성은 없어. 오히려 네가 의지를 보이지 않는다면 하루도 버티지 못하고 쫓겨날 거야.”
위드마크가 방긋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나랑 같이 가겠어?”
솔직히 빛이 날 정도로 예쁜 미소는 아니었다. 비대칭하고 서툰 미소였다. 그러나 어딘지 당당했다. 검은 머리의 꼬마는 그 미소가 마음에 들었다. 삐딱하지만 당당한 얼굴, 그와 함께 하면 자신의 인생도 변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일찍이 위드마크가 꼬마에게 몰두했던 것처럼, 꼬마 역시 금방 그에게 매료되었다. 한참 골몰하던 꼬마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위드마크가 품속에서 빵을 꺼냈다. 빵을 돌려주려는 건가 싶었는데, 그는 또 다시 이상한 말을 시작했다.
“자, 네가 훔쳐 온 빵. 나도 배고프니까 나눠 먹자. 나에게도 반절의 소유권이 존재하니까.”
꼬마는 정색했다. 그러나 눈가는 싱글싱글 웃고 있었다.
“너 말 정말 이상하게 말하는데 수긍이 가.”
“그게 내 능력 중 하나지. 크크.”
위드마크가 빵을 두 조각을 나누었다. 좀 더 큰 쪽을 낚아채며 꼬마가 말했다.
“내 이름은 울리히야. 「울리히 슈펜하우어」.”
방금 전 위드마크의 말투를 그대로 따라한 억양이었다.
두 아이들은 한동안 주점 그늘에서 웃음꽃을 피웠다. 위드마크는 연달아 거창한 이야기를 꺼냈다. 자신의 꿈은 세상을 바꾸는 거라느니, 켈티카로 가서 큰일을 할 거라느니, 아이들이 굶지 않는 나라를 만들겠다느니. 그 때 마다 울리히는 말도 안 되는 소리 그만하라며 키득거렸다. 천진난만한 두 아이들의 등 뒤로 쪽빛 파도가 방울 소리를 내며 흩어졌다.
아주 머나먼 옛날, 두 어린아이들만의 비밀이었다.
* * *
수십 년이 지났지만 나르비크의 풍광은 변치 않았다. 짭조름한 바다 냄새를 맡으며 갈색 눈동자의 남자가 천천히 눈을 떴다. 그날처럼 해안가에는 푸른 파도가 넘실거렸다. 투명한 햇살은 새하얀 건물 벽을 타고 올랐으며, 거리마다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갈매기 우는 소리보다 경적 소리가 더 요란한 소음투성이 항구 마을……. 예전 모습 그대로라며 기뻐해야 할 텐데, 오히려 불안감이 쌓였다.
나는, ‘우리의 꿈’을 지켜낼 수 있을까.
그날과 똑같이 남풍이 불고 파도가 쳤다. 그러나 그 때처럼 맑은 방울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바위를 깎아내리는 파도소리만이 귓가에 웅웅거렸다. 귀 기울기고 싶지 않은 음산한 목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았다.
‘거대한 바위도 언젠가 모래가 되는데, 그대라고 영원히 견고히 서 있을 수 있겠는가.’
남자는 다시 옛 일을 회상했다. 최대한 뚜렷하게 떠올리고 싶었다. 그 때 자신이 전했던 말도, 그 녀석이 답해주었던 얼굴도. 그러나 떠오르는 것은 결코 웃어주지 않던 맏아들의 얼굴뿐이었다. 결국 이번에도 다투고 나왔다. 정말로 ‘마지막’ 일지도 모르는데.
그래도 되돌아갈 마음은 들지 않았다. 되돌아가서도 안 되었다. 설령 역사의 파도에 떠밀려가더라도… 끝까지 긍지를 지키며 ‘우리의 나라’를 지켜나가리. 갈색 코트 자락을 나부끼며 위드마크 리프크네는 켈티카로 발걸음을 돌렸다.
* * * * * *
평범하게 '테일즈위버' 17명 중 누군가의 글을 쓰면 좋았을텐데 NPC 이야기입니다. 위드마크 완전히 잊힌 캐릭터라고 생각했는데, 시크릿챕터에도 나와주고 정말 감사합니다.
표지 이미지: PublicCo(www.pixabay.com) 원본, 후보정.
최종수정일: 2018.05.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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